장식과 범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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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취향관> 창간호 기고 글

누가 이 장신구들을 좋아하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누가 이것을 걸치려고 하겠는가? 이것을 좋아함은 그래서 플라톤적 애정일 뿐이다.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엄마에게 있어서 거실을 꾸미는 일은 가족이 모여서 단란하고 화목한 때를 만드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라기보다는 그저 좋아하는 물건들을 어디선가 본 대로 배치하고 전시함으로써 집을 찾는 사람들과, 특히 자신에게 보여주고 최면과 위안을 삼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엄마는 거실에 대해 플라톤적 애정이 있었던 것 같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에 빈에서 활동한 건축가 아돌프 로스는 1898년 [노이에 프라이에 프레세] 지에 기고한 사설 ‘인테리어’에서 “아름다운 난장판”에 대해 이야기한다. 소위 배웠다는 지식인과 전문가들의 이렇고 저런 말들에 휘둘려 “양식이 있는” 집을 꾸미는 사람들을 질타하며, 이러한 공간은 사람이 사는 집이 아니라, 집이 존재하고 부차적으로 사람이 거주하거나 혹은 아무도 살지 않는 공간이라 말한다. 그리고 그는 각자가 자기 집의 장식가가 되기를 촉구한다. 인테리어 디자이너도, 건축가도, 혹은 어떠한 전문가도 그 안에 사는 사람들만큼 공간을 잘 꾸밀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가구마다, 물건마다, 모든 사물마다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가족의 이야기를. 이 집은 완성된 적이 없었다. 그 집은 우리와 함께 커왔고 우리는 그 안에서 성장했다. 확실히 그 안에는 어떤 양식이 없었다. 즉 낯설고, 지나간 양식이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양식이 있었다. 그 거주인의 양식, 그 가족의 양식이.


내가 거실과 관련한, 혹은 거실에서 가족과 함께 만든 추억을 애써 상기해보려 해도, 지난 30년의 시간 동안 단 한 장면도 떠오르지 않는다는 건 로스의 주장에 일리가 있음을 입증한다. 따라서 아돌프 로스의 저서 제목이자 그의 수많은 저술을 관통하는 철학적 명제인 ‘장식과 범죄’를 나에게는 이렇게 적용할 수 있겠다; 온갖 장식과 진열품으로 가득했던,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하기만 했던 우리 집의 거실은 그렇기 때문에 아무도 온전히 제 역할을 다하는 공간으로 사용할 수 없었고,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으며, 거실은 거실로서의 기능을 전혀 하지 못했고, 거실에서 확장되어 집이 가지는 의미도 내게는 잠시 신세를 지다 언제든 떠날 수 있는 타인의 공간과 같았으며, 가족 공동체에서 쌓은 어떠한 추억도 집과 거실에는 묻어있지 않았고, 이에 훗날 내가 ‘거실’이라는 주제로 무언가를 써보려고 마음먹었을 때 마치 잘 알고 있지만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도시에 대한 여행 가이드를 적어달라고 요청받은 이 마냥 멍하게 빈 노트를 바라보아야 했으며, 적어도 거실에서는 부모에게서 어떠한 추억도 받지 못한 채 자라난 아이에게 장식적이며 전시적이기만 했던 거실은 어떤 의미에서 범죄이다. 



거실은 추억이다. 그리고 나는 한 번도 거실을 가져보지 못했다. 


매거진 취향관 창간호를 준비하며 편집장이 거실을 언급했을 때 쓰리-베이 아파트 평면도에 쓰인 알파벳 대문자 ‘L’을 떠올린 사람이 또 있었을까. 사람들은 텔레비전 채널을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리모컨을 둘러싼 권력 다툼, 늘어지게 붙어있던 소파, 엄마가 소담하고 조용히 개인의 취미활동을 하던 모습, 그 옆에 모로 누워 선풍기 바람을 쐬며 비닐장판 위로 떨어지는 그림자를 관찰하던 일상의 기억을 이야기했다. 나에게 그런 추억은 없다. 적어도 거실에서는. 그러므로 나는 한 번도 거실을 가져보지 못했다. 


성인이 된 후에도 마찬가지다. 스무 살부터 지금까지 줄곧 화장실만 분리된 형태의 원룸식 방에 살았으니, 감상적 표현이 아니라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거실 역시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것이다. 종종 타인의 거실을 향유해본 적은 있으나, 이 또한 어렸을 적 엄마의 거실과 마찬가지로 온전히 누리기 힘든 타인의 공간이었으니 몸과 마음을 충족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거실은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는 것이 맞다. 엄마의 전시적 거실도, 남의 집 거실도 진정한 의미의 거실이 될 수 없다면 나의 거실은 어디인가? 혼자 사는 사람들은 모두 거실 없는 삶을 살고 있다는 말인가? 거실은 어디인가. 



지난 3월, 급작스레 제주에 다녀왔다. 

 

‘제2회 낯선 콘퍼런스’(이하 낯컨2)라는 이름으로 모인 36명의 타인들은 2박 3일간 한 공간에 머물며 통성명을 하고 몸을 부딪히며 게임을 하고 팀을 나눠 짧은 여행을 떠났다가 저녁이면 술잔을 부딪히며 90년대 추억의 옛 가요를 함께 불렀다. 서울로 돌아와서는 더욱 끈끈해져 잠시 업무를 보다 카톡을 열면 낯컨2 단톡 방에는 수백 개의 읽지 않은 메시지가 있음을 알리는 빨간 아이콘이 붙어있었다. 시간이 되는 이들끼리 자주 만났고, 시간이 되지 않아도 잠을 줄이고 틈을 쪼개 더 자주 만났다. 각기 다른 분야의 실무자들이 모인 집단이라 생산적 협업도 일었다. 상식적으로는 이해되지 않지만, 생전 처음 만나 고작 3일을 함께 했을 뿐인데 우리는 오래된 친구보다 서로의 더 나은 내일과 행복한 일상을 응원했다. 치열했던 단톡 방의 열기와 매주 이어지던 번개만남의 열정은 두 달간 계속되다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지금은 자주 연락이 오고 가지는 않지만 살면서 마주치는 많은 이름들 뒤에 낯컨2 멤버들의 이름이 붙게 되었다. 집에 밥숟가락이 몇 개인지까지는 모르지만 어쩐지 잘 안다고 하고 싶은 사람들. 내 편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적은 아닌 사람 서른다섯 명이 생겼다는 건 때때로 거친 바다에 맨몸으로 내던져진 것 같은 마음이 들면 큰 위안이 되었다. 생일이며 명절을 챙겨 입에 발린 안부를 전할 필요는 없지만, 마음에 닿는 시 한 구절을 발견하면 함께 읽고 싶은 사람들. 느슨한 관계 속에 튼튼하게 엮인 이 낯선 공동체 안에서, 나는 살면서 처음으로 거실을 가져보았다. 

 

이에 거실이 물리적 공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확실해졌다. 거실에 필요한 건 비싼 가죽소파와 피사체가 너무 사실적으로 보여 징그럽기까지 한 고가의 텔레비전이 아니라 사소한 일상을 이야기하고 매일의 안녕을 빌어주는 사람이다. 그게 꼭 가족일 필요는 없다는 건 자명하다. 타인이 아니라 스스로와 대면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겉치레는 없고 진심이 있는 곳에 거실이 있다. 



로스는 말했다. “장식은 극복되어야만 하는 그 무엇이다. 파푸아 인과 범죄자가 자신의 피부를 장식한다. 인디언은 그들의 배나 선박까지 온통 장식으로 뒤덮는다. 그러나 자전거나 증기기관은 장식이 없다. 문화가 진보하면 사물을 장식당하는 것에서 떼어내 그 자체로 있도록 한다.” 여기에서 장식을 위선으로, 파푸아 인과 범죄자와 인디언을 타인으로, 사물을 관계로 치환하여 읽어보면 진심이 남는다. 힘주어 당기지 않아도 곁에 남을 수 있는 누군가가 있는 그곳이 바로 거실이다. 


늙은 장인에게 도면은 그 일을 수행하는 수공업자들을 이해시키기 위한 도구일 뿐이었다. 시인이 문자를 통해 이해를 시켜야만 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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